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건강을, 어떤 이는 자녀의 성공이나 재정적 안정을 소망한다. 겉으로 보기엔 ‘성취’와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과 영향력 확대에 몰두하는 헛된 소망을 붙들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며, 결국 죽음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이 무엇을 소망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믿음의 선진들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소망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질문은 단지 개인적인 바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결정짓는 신앙의 핵심적 물음이다.
1. 믿음의 선진들이 소망했던 것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했다고 증언한다(히 11:16). 이들은 땅의 삶을 잠시 머무는 나그네로 여기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처소를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받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또한 성경은 이들이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고, 부활과 영생을 소망했다고 말한다. 욥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내가 육체 밖에서(혹은 육체안에서 in my flesh: KJV)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고백하며 부활의 소망을 드러냈다. 신약의 사도 바울 또한 몸의 구속, 곧 부활을 기다리며 살아갔다(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본 것은 하나님의 의와 통치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였다. 다윗은 “주의 얼굴을 뵈옴이 만족하리이다”(시 17:15)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참된 만족과 소망의 대상임을 증언한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하라고 하신 것
하나님은 우리가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하고 사라지지 않는 유업을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베드로는 하늘에 간직된 유업, 곧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쇠하지 않는 유산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벧전 1:4).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은 의의 면류관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선언한다(딤후 4:8). 이 재림의 소망은 단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이끄는 힘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공의가 충만히 실현되는 완전한 세계를 소망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이 땅의 부패함과 불의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3.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실제로 신약성경을 보면 신자의 궁극적 소망은 다양한 말로 표현되지만, 그것들의 모든 실현은 주의 재림이라는 한 사건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약 성경에서 신자가 소망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마 6:10, 눅 19:11–12)
- 죽은 자의 부활 (요 5:28–29, 고전 15:52)
- 우리 몸의 구속 (롬 8:23)
- 양자 됨의 완성 (롬 8:23, 갈 4:5)
-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13, 계 21:1)
-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 (계 21:3–4)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 때에 한꺼번에 도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도 바울도 재림을 신자의 소망으로 중심적으로 강조한다:
- “너희가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그의 아들을 기다리나니 곧 우리를 장래의 진노에서 건지시는 예수니라” (살전 1:10)
- “그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4)
- “우리는 하늘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0–21)
- 신자가 품는 모든 참된 소망들—하나님 나라, 부활, 몸의 구속,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하나의 결정적 사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 2:13)
결론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는가는 단지 미래를 향한 바람이 아니라, 현재 삶의 방향과 본질을 드러낸다. 믿음의 선진들은 세상의 성공이나 안정이 아닌, 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았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썩을 것을 넘어 영원한 생명, 재림의 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길 원하신다.
나는 지금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 그것이 일시적인 만족과 세상의 인정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우리에게 눈을 들어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참된 소망은 하나님 자신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나는 오늘도 그 소망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문제의식.....
실제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것”과 “이 땅을 나그네처럼 여기며 하늘의 영원한 처소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은 언뜻 보기에 서로 상반된 태도처럼 보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떤경우에는 현실도피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의문에 성경적인 답은 무엇인가?
1.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막 1:15).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의와 평화와 회복)가 이 땅 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고 경고하셨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살아가며, 이 tension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를 종종 신학적으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고 부른다.
2. 나그네의 삶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하늘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 의를 실현하는 삶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 도피적이거나 무관심한 삶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속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분투했다.
- 아브라함은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기도를 했다.
- 요셉은 애굽에서 이방 민족을 살리는 지혜를 행했다.
-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의로운 통치를 위해 섬겼다.
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궁극적인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쇠하지 않는 유업(벧전 1:4) 곧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두었다.
신자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지만, 이 땅을 위해 파송된 자들입니다(요 17:16–18).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는, 그 나라의 가치를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 사랑, 공의가 조금이라도 더 드러나기를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불의한 법과 사회구조, 가난과 억압, 차별에 저항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의를 이 땅에 드러내는 행위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이 완전해질 것이라는 이상주의나 유토피아주의에 빠지지 않고, 결국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새 창조로 완성될 것임을 알고 기다린다.하늘의 처소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은, 이 땅의 헛된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의롭게 살아갈 힘의 원천이다. 결국, 신자는 이 둘을 분리하거나 대립시키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이 땅을 충실히 살아가는 자다. 이것이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아멘!
다른 문제의식....
이러한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것인데, 왜 성경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중에 사랑이 제일(가장 위대한 가치)이라고 했을까?
1. 고전 13:13의 문맥: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 구절은 사랑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의 결론에 해당한다.
문맥에서 바울은 은사들(방언, 예언, 지식)은 일시적이지만,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지속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2. 믿음과 소망은 ‘완성될 때 사라지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신뢰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믿음은 눈으로 보는 실제로 바뀐다.
-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 소망은 미래에 대한 기다림과 인내이다.
-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 몸의 구속, 주님의 임재가 현실이 될 때, 소망은 그 목적을 이룬 뒤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롬 8:24)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 사랑은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하나님 나라 안에서도 계속 존재하며 완전하게 된다.
-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요일 4:8),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삶은 사랑의 교제이기 때문이다.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 소망의 완성 이후에 남을 것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준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주의 재림은 믿음과 소망의 종착지이지만, 그 영원한 나라 안에서는 사랑만이 남고, 그것이 모든 것을 채운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다.μείζων δὲ τούτων ἡ ἀγάπη (meízōn dè toútōn hē agápē)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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