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적 불멸론은 인간의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하지 않으며, 오직 불멸(영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믿음이다. 전통적인 영혼불멸론(카톨릭과 대부분의 개신교)은 사람이 죽음 이후에도 그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다면 사람은 죽어서 그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 혹은 연옥에서 영원을 보내야 할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다.
조건적 불멸론에게 있어서 인간의 영혼은 불멸의 속성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소멸(annihilation)될 수 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들만이 불멸의 생명을 소유한다. 말 그대로 조건적 불멸론은 어떤 조건을 만족시킬 때,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 조건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는 전도자들이 가끔 이러한 방식으로 전도하는 것을 듣는다. "당신의 영혼은 죽어서 어디에선가 영원을 보낼 것이다. 그곳은 천국 아니면 지옥이 될 것이다." 그리고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설명해 준다. 불멸하는 영혼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은 짝을 이룰 수밖에 없다. 끝없는 의식적 고통은 불멸하는 영혼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영혼불멸설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사람이 죽은 이후에 그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는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불멸 사상
전통적인 영혼 불멸론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불멸하는 영혼을 상정한다. 하나님은 불멸하신 분(딤전 6:16)이기에 인간의 창조 시에 그 불멸성을 나누어 주셨다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같은 초기 교부들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 형상의 핵심이며, 따라서 불멸하는 영혼을 당연시했다. 플라톤의 이원론(몸과 영혼의 분리)도 기독교의 영혼 불멸설을 강화하는데 일조했다. 인간의 창조를 기록한 창세기로 돌아가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혼이 된지라"(창 2:7).
살아 있는 영혼인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는 새 번역,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들에서는 "살아있는 존재"로 번역했다. "살아 있는 영혼"은 불멸의 영혼을 암시할 우려가 있고, "네페쉬"는 히브리어로 "영혼", "생명", "존재" 등을 의미하며, 단순히 생명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이 표현은 창세기 2:19(동물)와 9:12(모든 생물)에서도 "살아 있는 피조물"로 번역되며, 인간에게만 독특한 불멸의 영혼을 뜻하지 않는다. "네페쉬"는 육체와 분리된 불멸의 실체로 묘사되지 않고, 통합된 생명체를 의미한다. 특히 창세기 3:22의 "...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은 불멸이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생명나무와의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세기 5:3절은 아담이 타락 후" 자기 모양대로, 자기 형상대로”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된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 불멸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혼(soul)"을 생각할 때, 영혼/몸의 대조라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젖어 그것을 어떤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에 국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성경과 히브리적 사고방식과는 사뭇 차이가 크다. "살아있는 혼(Liveing Soul)"은 살아있는 피조물로서 사람 그 자체이다. 니콜라이넨(Nikolainen)은 구약의 전체적 인간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사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입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때로는 몸, 살과 피, 혼, 영, 마음으로 나타난다. 이들 각각은 인간의 특정 특성을 묘사하지만, 사람을 나눌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닙니다. 몸은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이고, "살과 피"는 창조주와 구별되는 피조물로서의 사람이며, 혼은 살아 있는 인간 개체이고, 영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사람이며, 마음은 행동하는 전체로서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독특한 모든 것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사람은 모든 세포에서 하나님의 작품(몸)이며,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소유(혼)이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적(영)이며, 모든 행동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불순종(마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의 "최고 부분"의 생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 전체가 "위에서 아래까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합니다."
Kantonen은 기독교의 소망(The Christian Hope)에서 니콜라이넨(Nikolainen)의 1941년 핀란드어 연구 「복음의 빛 속에 있는 인간(Man in the Light of the Gospel)」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여기서는 헬러(Heller)의 "인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Man), " 222페이지에서 인용.
결론은 이렇다. 인간에게 죽음이 일어날 때, 생명을 잃는 것은 그 "혼(네페쉬, soul)"이다. 죽음은 "혼" 전체를 건드리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일관된 증언은 인간의 혼이 죽고, 파괴되거나 소멸되며, 꺼진다고 말한다(삿 16:30; 민 23:10; 겔 18:4; 겔 22:25, 27; 욥 11:20).
영은 하나님께 돌아간다
전도서 12:7을 근거로 해서 영혼 불멸론자들은 죽음 이후에 영이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고,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영존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영(spirit)"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ruach)는 "영", 호흡", "바람", "기운, 생명력"의 뜻으로 구약에서 389회가 쓰이는 단어이다. 루아흐는 주요하게 "생명의 호흡"이라는 의미를 가진다(창 6:17, 7:15, 22). 마음, 정신(창 26:35, 41:8, 45:27)의 의미도 갖는다. 시편 146편 4절은 루아흐를 호흡으로 번역한다.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한다." 에스겔 37:5는 루아흐가 마른 뼈를 부활시키는 생명소가 된다. 전도서 12:7에서 죽음 이후에 "영(혹은 '신'으로 번역)"은 어떤 의식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호흡이 다시 주신 분에게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반 짐승에게도 일어나는 현상이다(창 7:22, 23).
19세기 독일의 저명한 구약 성경 주석가들로, 히브리어 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유명한 카일과 델리취(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는 바람, 호흡, 영 등으로 번역가능한 루아흐가 불멸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인간을 포함해서)의 생명의 근원인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 임을 분명히 했다. 인간의 "루아흐"는 생명력이지만 불멸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약의 루아흐에 상응하는 신약의 단어는 "퓨뉴마"(πνεῦμα)이다. 이 단어도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 바람/호흡: 물리적 공기나 생물학적 호흡 (요 3:8).
- 영/생명력: 생명을 유지하는 비물질적 요소 (마 27:50, 예수님의 죽음).
- 영혼/정신: 인간의 비물질적 본질로, 육체와 구분되는 부분 (고전 2:11).
- 성령: 하나님의 영, 즉 성령 (행 2:4)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을 내어 놓으시니"(마 27:5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눅 23:46).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니 영을 내어주시니"(요 19:30).
영혼불멸의 관점에서는 "퓨뉴마"를 "영혼"(spirit/ soul)으로 번역해서 마치 예수님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고 간주한다. 사도행전 7:59에서 스테판이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말씀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그러나 "퓨뉴마"는 근본적으로 "생명력"(breath of life)나 "호흡, 숨"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많은 다른 역본들에서도(새 번역, 공동번역, 현대인 성경, NIV, ESV) "영혼을 내어주다"라고 보다는 숨을 거두시고 생명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스테판은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당하는 중에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외쳤다. 구약적 맥락을 볼 때 이것은 시편 31:5와 같다. "내 영혼(루아흐)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여호와여 진리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내 영혼"은 히브리어 "루아흐"(רוח, ruach)를 번역한 것으로, 여기서는 생명력이나 존재 전체를 뜻한다. 이 구절은 다윗이 고난 중에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영혼)을 하나님의 보호와 주권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고백을 보여준다.
영혼불멸론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프뉴마"(영혼)가 즉시 하나님께로 갔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이후에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 20:17) 말씀하셨다. 예수의 영혼이 죽음 이후 3일 동안 아버지와 함께 하였다면 "올라가지 않았다"라고 말씀하기는 어렵다. 예수님의 불멸은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불멸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썩지 않을 것, 죽지 않을 것을 입는"(고전 15:53) 부활의 몸에 적용된다.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6에서 예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위의 말씀은 영혼불멸론과 조건적 불멸론 사이의 주요 논쟁 지점 중 하나이다. 일반적인 이해는 "오늘"은 문자 그대로 그날을 뜻하며, 예수와 강도의 영혼이 죽음 직후 낙원(천국 또는 중간 상태)으로 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면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을 "네게 이르노니" 앞으로 위치시킨다면 낙원에 함께 있으니라는 말씀은 꼭 오늘이 아니라 단지 약속의 말씀이 된다. 그러한 의미변경을 위해서는 문장의 어순을 변경해야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구두점 위치만 변해도 그 의미가 달라진다.
- 구두점 위치: "Ἀμήν σοι λέγω, σήμερον(오늘) μετ’ ἐμοῦ ἔσῃ ἐν τῷ παραδείσῳ"
- 쉼표를 "λέγω"(레고, 이르노니) 뒤에 둠.
- 번역: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 개역개정, KJV: "Verily I say unto thee, To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 - 의미: 예수께서 강도에게 그날(죽음 당일)에 낙원에서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심. 이는 영혼이 죽음 직후 의식적 상태로 낙원(천국 또는 중간 상태)으로 간다는 영혼불멸론의 근거로 사용됨.
- 구두점 위치: "Ἀμήν σοι λέγω σήμερον, μετ’ ἐμοῦ ἔσῃ ἐν τῷ παραδείσῳ"
- 쉼표를 "σήμερον"(세메론, 오늘) 뒤에 둠.
- 번역: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의미: 예수께서 "오늘" 이 약속을 하며, 강도가 미래에(부활 시) 낙원에 들어갈 것임을 보장하심. "오늘"은 약속의 시점을 뜻하며, 낙원에서의 존재는 부활과 재림으로 연기됨. 이는 조건적 불멸론의 주장(영혼이 죽음 이후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불멸은 부활로 주어짐)과 조화됨.
고대 헬라어 사본(예: Nestle-Aland 또는 Textus Receptus)에는 구두점(쉼표, 마침표 등)이 없으며, 단어 사이에 공백도 일관되지 않다. 구두점은 후대 편집자들이 문맥과 신학적 해석에 따라 삽입한 것이다. 문맥을 고려할 때도 그렇다 강도의 요청("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은 미래적 사건(재림 또는 부활)을 염두에 둔 것이며, 예수의 응답도 이에 맞춰 미래 구원을 약속한 것이라고 본다. "오늘"은 약속의 확정 시점을 뜻한다. 구약에는 "내가 오늘 네게 진실로 말한다"와 완전히 동일한 표현은 없지만, "하이욤(오늘)"과 "말하다/명하다"가 결합된 패턴(신 4:39-40, 6:6 등)이 유사성을 보인다. 이 구절들은 "오늘"을 선언의 시점으로 사용하며, 실현은 미래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신 6:6) "오늘"을 통해 듣는 이에게 즉각적 주의를 환기시키고, 약속이나 명령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누가복음 16:19-31)는 일반적으로 신약 성경에서 지옥의 고통에 대한 가장 상세한 묘사라고 여겨진다. 해석자들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지옥(악인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목적지) 또는 하데스(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지대)를 언급하는 것으로 읽어왔다. 그러나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신 것을 끌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유의 모든 세부 사항을 사후 세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인 양 과도하게 해석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본문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지 비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본문의 전후맥락을 고려한다면 쉽게 반박된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 3절로 시작해서 비유를 시작하신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비유로 이르시되.." 주님께서 잃은 양의 비유(눅 15:4~7), 잃어버린 드라크마(은전) 비유(눅 15:8~10), 잃어버린 탕자 비유(눅 15:11-32),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를 말씀하시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는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비유가 바로 「부자와 나사로」 비유이다. 이 비유는 다른 비유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라고 시작한다.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눅 16:19). 뿐만 아니라 「부자와 나사로」의 기본 줄거리가 이집트 설화 「세트메와 시-오시리스」에서 유래되었고, 예수님은 이를 새로운 이야기로 재구성했다고 지적된다. 이집트 설화와 누가복음 비유 모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죽은 후 운명이 뒤바뀌는 이야기를 다룬다. 부자는 고통받고, 가난한 자는 위로와 영예를 받는다. 그러나 이집트 설화는 사후 세계의 구조와 심판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며, "부자와 나사로"는 회개와 하나님의 말씀(모세와 선지자)을 따를 것을 촉구하는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데서 차이가 보인다. 이집트 설화가 "부자와 나사로"의 기원으로 직접 연결 지을 수 없더라도, 당시 지중해 지역에 퍼져있던 유사한 민간 설화의 일부를 예수님께서 사용하셔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독특한 메시지를 추가했을 가능성이 많다.
본문의 비유를 사후세계에 대한 실제적 상황의 묘사라고 한다면 기상천외한 교리가 만들어진다.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부자는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본다(23절). 그렇다면 악인들이 죽어 불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면서 낙원에 있는(아브라함의 품) 의인들을 눈으로 본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눈다. 우리가 죽은 이후에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우리의 불신자들(가족, 친구, 이웃, 조상들)이 구해달라는 아우성을 듣고 응답할 수 있는가? 낙원(천국)이라는 곳이 지옥에 있는 영혼들의 비참함과 끔찍함을 영원히 지켜보고 감내해야 하는 장소라면 그곳은 환희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천국에서 불신자들의 끝없는 고통을 보며 그곳을 환희의 장소라고 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디스트(sadist)"의 혐의를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탐욕과 청지기 직분에 대해 설교해 오셨다(누가복음 16:1-13). 부자의 유일한 암시된 죄는 나사로를 완전히 이기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종종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자와 나사로"는 이 진리를 완벽하게 예시한다(16:19, 25). 예수님께서 이야기 끝의 결론(16:31)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것처럼 부자가 지상에서 저지른 잘못은 그가 떠난 후에도 그의 형제들이 계속 저지르는 동일한 것인데,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모세와 선지자들의 글)을 무시하고 산다는 것이다. 사후의 두 가지 상황(지옥의 고통/ 아브라함의 품)은 청중에게 익숙한 언어인 민간설화를 끌어온 것이다. 라이트(N.T. Wright)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한다.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진 민간 설화의 분명한 메아리를 담고 있으며, 예수께서 이에 새롭고 놀라운 변화를 주신 것이다. 이 비유의 강조점은 방탕한 아들의 비유에서 두 번, 즉 아주 강하게 강조된 바로 그 지점과 동일합니다. 즉, '부활', 곧 '유배로부터의 귀환'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흔히 생각하듯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확실히 하라는 경고가 아닙니다"(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255). 헌터(Hunter)는 예수님의 의도된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약 사람이 구약 성경을 손에 들고 문 앞에 나사로가 있는 상황에서 인간적이지 못하다면, 다른 세계에서 온
문자나 지옥의 공포에 대한 계시도 그를 가르치지 못할 것입니다 - Hunter, Interpreting the Parables, 84.-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빌 1:2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가 된다면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여 있노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being witn the Lord) 있을 욕망이 더욱 간절하나 그렇게 되지 않고 육신으로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위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1차 로마 투옥 시(주후 60-62) 미결수로 석방의 희망을 가지고 빌립보 신자들에게 쓴 옥중서신이다. 영혼불멸론자들은 바울이 죽자마자 자신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을 기대한다고 해석함으로써 영혼불멸을 뒷받침하려 한다. 고린도 후서 5장 6~8절의 말씀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 일단은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언제 발생하는지 다른 성경 구절을 탐색해 보자.
1. 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 데살로니가전서 4:13-17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너희에게 주의 말씀으로 이것을 말하노니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가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에서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 고린도전서 15:51-54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 기록된 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4.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 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을 볼 것이기 때문이니."
5. 요한계시록 20:4-6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라… 그들이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것이 첫째 부활이니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6. 마태복음 24:30-31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위 구절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는 시점이 재림과 부활의 때임을 강조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7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가 재림과 부활 후임을, 고린도전서 15:51-54는 부활의 시점에 불멸의 몸을 입는다고, 요한일서 3:2는 재림 시 그리스도와 같아진다고, 요한계시록 20:4-6은 첫째 부활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한다고, 마태복음 24:30-31은 재림 시 택하신 자들이 모인다고 밝힌다.
다시 빌립보서 1장에 기록된 말씀으로 돌아가자.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라고 표현한 구절에서 "떠나서"라는 말이 그의 죽음을 가리킨 것은 분명하다. 떠남과 함께 있음이 연속적으로 보이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성경 안에서는 실제 멀리 떨어진 사건도 그렇게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이사야 61장 1, 2절을 설교하시면서 주님의 초림에 벌어진 일들 만을 인용하신 후에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라고 하셨다(눅 4: 14~21). 그러나 주님은 이사야 61장의 2절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보복(신원)의 날"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 일이 주님의 재림 때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은 연속된 시간의 사건으로 보이지만 2000년 이상의 시간적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떠남"과 "함께 있음"은 반드시 시간적 연속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고린도 후서 5장 8절의 말씀 "몸을 떠난다"는 것과 "주와 함께 거한다"는 사도 바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같은 장 1~4절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현재의 육신)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부활시 받게 될 영원한 몸)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니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벗을 것이 아니라 덧입기를 원하나니(새로운 부활의 몸) 이는 우리가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니라. 우리가 이 장막에 있을 때에 탄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음은 우리가 벗기를 원치 아니하고 덧입기를 원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의 장막(육신)이 무너지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덧입는다는 표현은 부활의 영원한 몸을 입는다는 표현이다. 그때는 바로 4절에서 기록된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는" 때이다. 고린도 전서 15장 54절의 말씀처럼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 때이다. 사도 바울이 진정 원하는 바가 자신의 육체를 떠난 영혼이 주님과 함께 복된 시간을 누리는 것인가? 아니면 부활의 영원한 몸을 입고 주님과 연합하는 것인가? 문맥과 많은 성경 구절들은 후자임을 분명히 한다. 영혼불멸 사상은 신자들로부터 주의 재림과 부활의 절대적 소망을 앗아가고, 죽어서 막연히 천국 간다는 이교적 소망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물들였다. 다음의 비교표는 하나님 말씀의 참된 조화를 보여준다.
고린도후서 5:1–8과 로마서 8:22–24는 모두 현재의 고통과 장차 올 영광, 그리고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신자의 소망을 다루는 아름다운 병행 구절이다.
현재 상태 | 땅에 있는 장막 집에 거함 (5:1) 육체 안에 거하며 주와 떨어져 있음 (5:6) 믿음으로 행함, 보는 것으로 하지 않음 (5:7) |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함 (8:22) 우리도 속으로 탄식함 (8:23) |
탄식의 이유 | 하늘에 있는 집으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함 (5:2) 벗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덧입고자 함 (5:4) |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림 (8:23) |
소망의 대상 |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집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짐 (5:1, 4) | 소망으로 구원을 얻음 (8:24) 보이는 소망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람 |
보증/첫 열매 |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주심 (5:5) | 우리도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짐 (8:23) |
믿음의 자세 | 담대함 (5:6, 8)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함 | 소망 중에 기다림 인내로 기다림 (8:24–25) |
계시록 6장의 순교당한 영혼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우리 피에 대하여 심판하사 보복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미루시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9-11).
이 구절은 다섯 번째 인이 열릴 때 "제단 아래에" 순교자들의 "영혼들"(ψυχὰς)이 존재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를 위해 죽임을 당한 자들로 묘사된다. 영혼불멸론자들은 이것을 보고 사후에도 영혼이 의식적 실존을 가지고 영존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일단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계시록이라는 책은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묵시문학 장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극히 당연하고 초보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성경의 해석자들 혹은 설교자들이 자주 간과하는 부분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실제와 상징을 구별여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4:10절은 말한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이것은 정말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인가? 이러한 이미지는 가인의 범죄와 아벨의 고통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의인화(personification)라는 문학적 기법이다. 하나님께서 피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것은 그분의 공의를 상징하고, 죄가 숨겨질 수 없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히브리서 12:24절은 "예수님의 피가 아벨의 피보다 낫게 말한다"라고 기록한다. 창세기 4:10에서 아벨의 피는 땅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복수를 호소한다. 이는 정의와 심판을 요구하는 피이다. 예수님의 피는 속죄와 용서를 "말한다"(헬라어: λαλοῦντι, "말하는" 현재 분사). 이는 단순히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피가 상징하는 효력을 나타낸다. 실제와 상징을 구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조야한 문자주의의 오류에 빠져서 잘못된 교리를 건축한다. 계시록 5장 6절에는 예수님께서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어린 양"으로 묘사된다. 신자들이 천국에 가면 어린양을 볼 수 없다. 더욱이 괴물처럼 생긴 여러 뿔들과 눈들을 가진 양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신 것은 인류의 속죄 희생이 되신 것을 상징하며, 일곱 눈과 일곱 뿔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능력과 주권적인 권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동일한 원리가 순교당한 영혼들이 제단아래서 하나님께 외치는 보복과 탄원의 소리에 적용된다. 제단은 구약에서 희생 재물을 바치는 장소로, 속죄와 헌신의 상징이다. 제사 때 흘린 피는 제단 아래로 흐르거나 뿌려졌고, 피는 생명(ψυχή)을 상징한다. "제단 아래"에 순교자들의 영혼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 제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로, 그들의 생명이 제단 아래에 상징적으로 남아 하나님께 헌납된 상태를 나타낸다. "제단 아래"에 있는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주권 아래 있으며, 그들의 희생이 무의미하게 버려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에 있는 순교당한 영혼들은 의식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속에 남아 있어,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부활과 정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는 것이다. 또한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이 깃든 장소로, 단순한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운 신성한 영역을 상징한다. 만일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지금의 기독교 역사가운데 순교한 모든 수억만의 영혼들이 재단 아래서 여전히 자신들의 피에 대해 보복해 달라는 부르짖음의 향연이 끝없이 이어지는 그야말로 아우성이 귀를 찢을 듯 하늘을 가득 메울 것이다.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은 순교자들의 희생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아래 보존되며, 최후의 부활과 심판을 기다리는 상태("잠시 동안 쉬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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